본문 바로가기
나의 주제들/공황과 우울

2. 이유가 없다는 것은 모든 것의 이유가 된다

by manydifferent 2021. 3. 16.

좁은 공간.

나는 어릴 적부터 좁은 공간을 싫어했다. 조금이라도 갇혀있는 듯한 느낌이 들면 신경이 곤두서고 예민해졌다. 누군가 장난으로 나에게 이불을 덮어 씌우면 비명을 지르며 뛰쳐나왔다. 또래 애들이 '햄버거 놀이'를 하면 정색을 하고 빠져나와 화를 냈다.

그래도 자라면서 조금씩 증상이 나아지는 듯 했다. 20살이 되고 난 후에는 몸 상태가 좋지 않을 때를 제외하고는 일상 생활에는 지장이 없는 정도가 되었다. 친구와 함께 고속버스를 타고 통영까지 여행을 다녀오고, 좁은 비행기를 타고 일본을 다녀오거나 하는 동안에도 조금 예민한 정도였지 공황에 가까운 공포를 느끼거나 하진 않았으니까. 나는 그렇게 자연스럽게 괜찮아지는 줄 알았다.

어느 날 화장실 문고리를 교체하다가 화장실에 갇혔다. 문이 닫힌 채로 문고리가 떨어져나간 것이다. 아무리 잡아당겨도 문이 열리지 않았다. '갇혔다' 는 생각에 사로잡히는 순간 공황에 빠졌다. 태어나서 느껴본 공포 중에 가장 생경하고 날카로웠다. 시야가 좁아지고 어지러웠다. 절벽에 매달려 금방이라도 떨어져 죽을 것만 같은, 아니 죽음이 너무 무서워 차라리 지금 당장 죽고 싶다는 느낌이 심장을 뒤덮었다. 숨이 막혔다.

10분이 되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나는 아직도 그 느낌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예민하지 않은 사람이라면 코웃음칠 이야기겠지만, 글쎄. 나도 그런 공포가 없다면 화장실에 이틀 정도는 더 있을 수 있었다. 그러니까 누구라도 '이런 공포를 느낀다면' 아무리 사소한 거라도 두려워서 오줌을 쌀 지경일 거다.

공포가 공포를 만든다는 것 다음으로 끔찍한 사실은 뭘까? 이런 끔찍한 상황이 펼쳐지는 이유를 도무지 알 수가 없다는 거다.

나는 좁은 공간, 내 의지로 쉽게 빠져나올 수 없는 상황에 처하면 공포를 느낀다. 언뜻 보면 이런 환경 조건이 이유가 될 거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평소에는 잘 타고 다녔던 버스와 지하철에서 공포를 느끼기 시작하면 이런 이유는 쉽게 설득력을 잃는다. 그리고 이런 맥락은 단순히 설득력을 잃는 것을 넘어서, 공포가 다른 곳으로 확장될 여지를 마련해준다. 그러니까 이유 없이 이런 일들이 일어난다는 사실이 또다른 이유가 되어주는 것이다.

나는 광역버스를 타고 있었다. 버스가 고속도로에 진입하자 가슴이 답답해지기 시작한다. 열리지 않는 창 너머로 보이는 도로, 도로, 빠르게 지나가는 차, 도로...... . 등줄기를 타고 불쾌한 전율이 뻗어오른다. 머리가 아프다. 이 공포가 곧 머리로 치솟아 터져나올 거라는 생각이 들자 나는 불안해진다. 잠깐.

'이런 버스 한 두번 타는 것도 아닌데, 괜찮아. 그동안은 괜찮았잖아. 갇히긴 뭘 갇혀. 사람도 별로 없고, 앉아서 가면 좋은 거지. 편하게 핸드폰이나 하다가 내리면 돼. 괜찮아. 이건 갇힌게 아니야.'

공포가 아주 조금 가라앉는다. 괜찮아질 거라는 조짐이 보인다. 잠깐.

'내가 이 세상에 갇혀있다고 생각하게 되면 어떡하지? 이게 지극히 일상적인 거라면, 버스에서 내려도, 집에 있어도, 난 언제든 이런 공포를 느낄텐데.'

당신은 이 이야기가 말장난 같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이 글을 쓰는 지금 나는 당신 생각에 완벽히 동의한다. 아무 이유 없이 공포를 느낀다고, 아무데서나 공포를 느끼게 된다니. 애들 장난 같은 이야기다. 그렇지만 어떡하겠는가. 내가 이런 애들 장난 같은 삶의 주인공인데 말이다.

공황장애는 자연적으로 치유되는 경우가 적다고 한다. 예고 없이 일상을 파괴하는 공포는 무력감과 불안을 학습시킨다. 나는 알 수 없는 이유로 공황발작을 몇차례 경험했다, 그 후로 그 강렬한 경험은 내 뇌리에 남아 유사한 상황들을 연관지어 불안을 강화시키고 있다. 그리고 이런 과정은 너무나 자연스럽게 일어난다. 지금 나는 때때로 내가 집 안에 갇혀있다고 느낀다. 그리고 언제 이런 공황이 찾아올지 몰라 두려워하고 있다.

계속

2021.03.15

'나의 주제들 > 공황과 우울' 카테고리의 다른 글

1. 공포가 공포를 만든다  (0) 2021.03.16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