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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와 글쓰기/글쓰기

이곳에 있는 것에 대해서

by manydifferent 2020. 8. 21.

요즘 부쩍 우울한 기분이 드는 날이 많다. 우울한 기분이 심하면 죽고 싶다는 생각도 든다. 요즘 내가 누군가를 만나면 화들짝 놀라는척하며 하는 말이 있다. '세상에 죽고 싶다는 생각을 안 하는 사람이 있다' 고

좋아하는 방법은 아니지만 세상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이분한다면 '죽고 싶어하는 사람'과 '살고 싶어하는 사람'이 아닐까. 나는 참 오래 전부터 죽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자살하고 싶다는 말. 죽고 싶다는 말. 언젠가 나는 그게 현실성 없는 막연한 농담같은 것이라고 말한적이 있지만 내 감정이 거짓은 아닐테다.

나를 자각할 때 드는 느낌이 불쾌하게 끼친다. 우주 한복판에서 지구를 점처럼 바라보는 마음과 비슷하지만 온화하게 관조하는 것이 아닌 더러운 진창에 있는 것 같다. 이 모든 일들이 과거에서 시작되어 희망 하나 없는 미래로 이어져 지긋지긋하고 구질구질한 터널에 주저 앉아있는 기분이다. 최근에 느낀 죽고 싶다는 기분은 이런 느낌과 비슷했다. 나는 아마 세상에 다양한 형태의 이런 마음이 존재할 거라고 생각한다. 나는 내 안에 다양한 진창과 터널을 느낀다.

죽고 싶다는 생각과 자살 시도는 연결되어있는가. 자살 시도 혹은 자해에는 동기와 결단이 필요할 것이다. 자살 시도의 동기와 결단은 지긋지긋함과 희망 없음, 구질구질함 등을 유발하는 환경적 요건에서 비롯될 수 있다. 인간을 환경이 만들어낸 인과에 종속되는 존재로 볼 것인지 아닌지는 쉽게 판단할 수 없는 문제이다. 하지만 나는 자살시도를 환경적 요인을 극복하기 위한 인간 최후의 능동적인 행동 혹은 환경적 요인에 의한 타살에 가까운 사건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이 생명 유지를 위한 본능적 활동을 하는 존재라는 점을 미루어보아도, 자살 시도를 하는 인간에게는 '죽고 싶은 기분' 을 넘어서 동기와 결단을 요구하는 환경적 요인이 있어야한다. 이와 관련해서 나는 과거에 자살 방지를 위해 시설물을 설치한 마포대교에 찾아갔을 적의 경험을 기록한 글을 가져오고 싶다.

나는 아직도 그 때 내 확신을 설명할 수 없고, 또 마포대교에 서있을 누군가를 이해할 수도 없다. 다만 그 날의 경험은 씨앗처럼 뿌려져 내 머리에 어떤 뿌리를 박고있다. 이해할 수 없는 고통에 대해 말하려는 노력은 하지 말자. 그 일그러진 틈으로 어떤 사람들은 훨훨 날아가버릴 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들이 왜 이곳으로 찾아오는 지, 넘기도 힘든 난간 사이로 무거운 몸을 밀어넣으면서 어떤 생각을 하는지, 나와 똑같이 죽음을 두려워 하는 누군가가 어떻게 물 아래로 몸을 내던질 수 있는지, 마포대교를 걸어 지나가는 사람들은 여전히 모르고 있다.

나는 아직도 난간 사이에 몸을 밀어넣는 생각을 하면 소스라칠정도로 두렵다. 자살이란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인가? 정말 적은 수의 경우(영웅적 면모에 가까운)를 제외하고는 자살은 타살에 가깝다. 자살하는 존재의 주체성을 인정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극복할 수 없었던' 환경적 요인을 하나씩 제거하고 나서도 인간이 자살할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까. 자살하는 존재가 온전한 주체성을 가지려면 환경적 요인을 견고하게 만들어나갈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상태로 '자살을 하지 않을 수도 있는데' 자살하는 경우라야한다. 그리고 그런 능력을 가진 사람은 그리 많지 않고, 그들은 죽으려하지 않는다. 이러니 대부분의 자살은 타살의 성격을 띌 수밖에 없다. 비약하면 지금 누군가가 끊임없이 차가운 난간 사이로 누군가를 밀어넣어 죽이고 있는 셈이고, 나는 그렇게 누군가를 죽이고 또 떠밀려 무력하게 죽어가는 사람들이 득시글거리는 세상에 살고 있는 거다.

하지만 나는 좀처럼 내리누를 수 없는 무언가가 날 덮쳐오기 전에는 죽으려고 들지 않을 것 같다. 짙은 우울 때문에 종일 가라앉아 있을 때는 더욱 죽으려고 들 수가 없다. 죽어 없어지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은데도, 내 몸이 멈추어 죽는 것은 막상 닥치면 무섭고, 아프고, 또 낯선 일일 거다. 동기와 결단 없이는 쉽게 이루어질 수 없다. 이것은 자살이 그만큼 비극적인 이유이기도 하다. 내 주변에 누군가가 자살을 했다는 소식을 듣는다면 그것만큼 슬픈 일이 있을까.

나는 이런 생각을 한다. 가난하고 못생기고 병든 몸으로는 죽는게 낫다. 라는 생각에 반대하는 사람은 위선자다. 그리고 동의하는 사람은 살아있는게 아무 의미도 없는 사람이다. 죽어 마땅한 사람이다. 이 세상에는 위선자거나 죽어 없어질 쓰레기 밖에 없다. 왜냐면 우리 주위에는 죽고 싶어하는 사람이 있고, 자살하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가난하고 못생기고 병든 몸은 우리 주위에 널렸다. 나도 그들 중 하나이다. 그런데도 이들이 받는 차별이 부당하고, 이들이 사랑받지 못하는 것이 부당하다고 말하는 사람은 위선자일 수밖에 없다. 가난하고 못생기고 병든 몸을 만들어내는 것은 결국 여기 사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런 고통을 받는 사람은 트럭에 몸을 쌓아 쏟아부어도 끝이 없을 정도로 수두룩하고, 그 중 모두는 아무에게도 사랑받지 못한다. 혹시 당신은 가난하고 못생기고 병든 사람들이 고통 받는 것을 반대하는가? 당신도 위선자다. 당신은 가난한 사람을 사랑하지 않고, 못생긴 사람을, 병든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고작해야 조금 거리를 두고, 최대한 편견 없는 시선을 가진 사람인 '척'하려고 할뿐이다. 당신은 정말로 그들과 사랑에 빠지지 않는다. 당신은 그들의 몸 어디에도 입을 맞추려고 하지 않는다.

누군가는 차라리 세상이 그렇게 생겨먹은 것을 인정해야하지 않냐고 한다. 거들먹거리면서까지 말이다. 가난하고 못생기고 병든게 죄지. 마치 그게 자연의 순리인 것 마냥 말한다. 나는 진심으로 그들을 저주한다. 가장 추악한 모습으로 병들고 가난해졌으면 좋겠다. 그럼 그들도 깨닫게 될 것이다. 자신들이 병들고 가난하기만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병들고 가난한 것이 존재를 규정하는 모든 것이 될 수 없다. 병들고 가난한 사람은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병들고 가난한 사람처럼 죽는게 낫다고 여겨지거나, 죽어가는 존재가 있는 곳에서 사는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고, 아이들의 실없는 장난보다도 못한 것이다.

어지간히 이기적인 사람이 아니고서야 할 수가 없는 짓이다. 여기에서 사는 것은. 이 구질구질한 곳에서 편히 자려고 하는 것은. 아가리에 달콤한걸 쑤셔넣고 부른 배를 두드리는 것은 말이다. 지긋지긋하다. 다들 본인이 저지르는 것이 위선이라는 것도 모른다. 뭣도 아닌 것을 숭고한 가치인냥 숭배하고 순결한 마음에 젖어 자위한다. 다들 그런다. 다들 정말로 그런다. 이곳은 지긋지긋하고 더러운 곳이다. 나는 이런 생각이 들면 마냥 죽고 싶어진다. 왜냐면 그 위선자도 나고, 거들먹거리는 쓰레기도 나고, 아이들의 실없는 장난보다도 못한 삶을 사는 것도 나이기 때문이다. 우울감이 나를 내리누른다. 조금이라도 걸을라치면 더러운 진창에 빠뜨려 집요하게 끌어당긴다. 요즘 부쩍 우울하다. 나는 여전히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이다.

2020.08.21 오후 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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