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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주제들/책

이모 - 권여선 (안녕 주정뱅이)

by manydifferent 2019. 4. 2.

 

 

 

이모

 

 요즘에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 일이 많다. 여태까지 나는 주로 하고 싶지 않은 것을 하지 않는 데에 힘을 쏟았었다. 그렇게 온 힘을 다해 나에게 아닌 것들을 밀어내고 나면, 내 공간은 아주 텅 비어버린다. 누군가의 말을 빌리자면, 그 때의 나의 공간은 못견디도록 황량하여, 체면치레를 해야하는 어른만 아니라면, 그만 엄마를 찾으며 울어버리고 싶다. 하지만 그 공간이 정말 황량한 이유는, 그 곳에는 엄마라는 것도 없고, 나의 울음을 목격할 누군가도, 짐승처럼 신음하는 내 목소리가 메아리칠 벽도 없다는 데에 있다.

 

 그 텅 빈 공간에 웅크리고 앉아있노라면, 나는 권여선의 '이모'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이모'의 세계에는 섬뜩하리만치 무의미한 사건들과 소외가 있다. 함부로 '나'의 공간에 무언가를 욱여넣고, 순진무구하지도 폭력적이지도 않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세계가 있다. '나'는 자신과 무관하게 채워진 공간 속에서 그냥 살아간다. 그냥 살아가고, 그냥 살아가다가, 더는 그냥 살아가지 않기로 한다. '이모'의 화자는 그런 '나'로 살아가는 남편의 이모를 만난다.

 

 

 오늘 단편을 다시 읽으면서 유독 기억에 남는 것이 있었다. 이모는 대학 1학년 여름, 술에 취해 죽은 아버지를 대신해 가장 노릇을 하게 되었다. 그것은 이모 자신과 무관하면서, 이모의 삶을 결정 짓는 최초이자 가장 비극적인 사건이었을 것이다. 같은 해 겨울, 이모는 학생들과 어울리는 어느 지하 주점에서 자신에게 호감을 갖는 누군가를 만난다. 그가 '잡아주길 바라고 무력하게 건넨 손바닥'에 그녀는 담배를 지져 끈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도 깜짝 놀라, 베란다로 나가 자신이 왜 그랬는지 생각을 하다가, 이내 자신의 손바닥 가장 깊은 곳에 담배를 눌러 끈다. 이모는 그것에 의문을 품으면서도, 단지 성가시고 귀찮아서 그랬을 것이라고 말한다.

 

 

 이후로 이모는 자신의 삶에 대한 이야기들을 몇 번이나 되풀이 한다. 하지만 그 이야기들은 매번 뭔가 조금 달라진 것 같이 느껴진다고 말한다. 죽음을 앞둔 쇠약한 몸으로 이모는 말한다.

 

 

'나도 애초에, 이렇게 생겨먹지는, 않았겠지. 불가촉천민처럼, 아무에게도, 가닿지 못하게. 내 탓도 아니고, 세상 탓도 아니다. 그래도 내가, 성가시고 귀찮다고, 누굴 죽이지 않은 게, 어디냐? 그냥 좀, 지진 거야. 손바닥이라, 금세 아물었지. 그게 나를, 살게 한 거고.'

 

 

 그리고 이모의 이야기는 '나를 살게 한 그 고약한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물음으로 끝난다. 

 

 

내가 읽는 이모

 

 

단편의 초반, 이모는 차라리 자기가 손해를 보고 마는 스타일이라는 타인의 평가가 나온다. 이모의 이야기를 듣기 전에는 이것이 당당한 어른의 이야기로 느껴졌다. 하지만 이것은 자기를 파괴하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아이의 이야기였다. 다만 그 방식이 너무 노련하여, 그리고 너무나 숭고하여, 함부로 할 수 없는 이야기였다.

 

 내가 줄곧 해오던 생각이 있다. 마음이 내키지 않는 일을 하지 말아야한다고. 이것은 폭력을 감당하지 말아야한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나의 공간에 나와 무관하면서, 나를 결정 짓는 무언가가 들어오지 않도록 해야한다. 감당할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이려고 하면, 그것은 언제든 튀어나와 누군가를 해칠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나 자신일 수도 있다. 이모가 담배를 지져 껐어야 하는 곳은 손을 건네는 사람의 손도, 자신의 손도 아니어야 했다. 하지만 이모는 자신의 폭력성을 목격했고, 총구를 자신에게 돌리는 방향으로 속죄하려고 했다. 그리고 그 이후로 모든 이야기는 뒤틀린 채로 진행된다.

 

 여기에 누군가의 잘못이나 죄, 아쉬움과 책임 따위는 없다. 이 곳에는 단지 여전히 섬뜩하리만치 무의미한 사건들과 소외가 있고 그 순간들을 살아낸 누군가가 있을 뿐이다. 내가 비워둔 공간의 어느 자리에 웅크리고 앉아있을 때면, 나는 이 단편이 생각난다. 그리고 읽는다.

 

 

 내가 이 글을 쓰게 된 이유

 

 

 스무 살 무렵부터 책을 내 돈으로 사서 읽기 시작했다. 당시의 나는 몰랐다. 그러니까 그 때는 책을 읽으면 책도 작가도 거진 멋져보였기 때문에, 내가 사들인 이 책들 중에 무엇을 기억하게 될지 몰랐다. 금세 내 방 선반이 채워질만큼의 책이 생겼다. 관리하지 않는 선반에 먼지가 뿌옇게 쌓일 즈음 자연스럽게 분명해지는 것이 있었다. 이것은 내가 먼지를 털어내고 굳이 다시 읽으려는 책이 있었는가에 대한 이야기다.

 

 일 년전에 책장을 정리했다. 책의 높이를 고려해서 순서를 정하고, 선반의 너비에 꼭 들어맞도록 책을 꽂았다. 나는 정리를 잘 하지 않는 편이다. 이렇게 한 번 대충 정리를 해두고 나면 먼지가 쌓여도 훔치지 않는다. 책장에 꽂혀있는 책들은 한 때는 열심히 읽은 것들이지만 어지간하면 다시 읽는 일이 없었다. 나는 늘 그 이유가 내 집중력이 형편없어서, 내가 한 가지 일에 차분히 몰두할 줄을 몰라서라고 생각했다.

 

 책장에는 권여선의 책이 두 권있다. 안녕 주정뱅이와 비자나무 숲이다. 평소에 시간을 보내다보면 권여선의 단편이 머릿속에 내가 겪은 일처럼 생생하게 떠오르는 일이 자주 있었다. 그럴 때면 책을 다시 꺼내 읽을 마음을 먹었다. 이것은 나에게는 드물고 신기한 일이다. 나는 오늘 아침에도 단편집 안녕 주정뱅이를 꺼냈고, 이모를 읽었다. 그리고 권여선의 책이 꽂힌 자리에만 먼지가 희미하다는 걸 알았다.

 

근사하고 매력적이라고 생각했지만 내가 두 번을 읽진 않은 것이 있고,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도 윤곽조차 제대로 기억나지 않는 것이 있다. 그러니까 내가 책을 두 번째로 읽기 전까지는, 혹은 충분한 시간이 지나기 전까지는 모르는 것이 있는 것이다. 누군가는 꼼꼼히 책을 읽지 않은 나를 탓할 것이고, 작가의 노고와 책의 가치를 발견하지 못하는 나의 미숙을 꾸짖을 수도 있을 거다. 하지만 내 삶은 그냥 내 삶이다. 내가 최선을 다해 살아낸 삶의 순간들이 있다면, 그 길목에서 마주치는 것들의 가치는 온전히 내가 판단하는 거다. 내가 모르는 것에 대해서 말하지 않고, 나에게 값진 것에 대해서만 말한다면 그것은 나의 정답이다.

 

2019.4.2 오후 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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