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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와 글쓰기/글쓰기

시티블루

by manydifferent 2020. 3. 30.

  너무 감상적이거나, 너무 냉소적이야. 나는 아마 그렇게 말했던 것 같다. B는 이어폰 한 쪽을 빼고는 의아한 표정으로 뭐라고? 하고 물었겠지. 사실 나는 이제 B의 입모양 말고는 모든게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나는 오래전부터 이야기하고 있었는데도 마치 방금 시작된 이야기를 듣는 사람처럼, B의 반응은 항상 그랬다. 내가 자리에서 조용히 일어나 B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카페를 떠나는 상상을 하는 동안 B는 먼저 가봐야겠다며 짐을 챙겼다. 그 날이 B와의 마지막이었다. 내가 차인 걸까? 글쎄. 그 후로 두세 번 B에게서 연락이 왔지만 나는 받지 않았다. 그럼 내가 찬 걸까?

  귀가 뻐근했다.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는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역 앞에는 지나다니는 사람이 많았다. 사람들은 하나같이 무표정한 얼굴에 우스울정도로 걸음이 빨랐다. 다들 입을 닫고 있는 것 같은데도 길거리가 시끄러웠다. 귓속에 들어찬 노래와 소음들이 뒤섞여 잡음에 가까워졌다. 뻐근한 귀의 감각이 점점 무뎌졌다. 나는 조금씩 무신경해진다. 역에서 계단을 오르는 낯선 얼굴이 보였다. 나는 또 다른 B를 만났다. 반가운 인사를 나누지도, 손을 잡지도 않았다. 나는 속도를 맞추어 걸었다.

  의외로 나는 너무 예민해지는 걸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너무 예민해져서, 이렇게 모든 것에 예민해지면 그게 그냥 무신경해지는 걸지도 모르잖아. 나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B와 작별인사를 했다. 이건 작별일까? 잠깐 웃음이 났지만 웃지 않았다. 만난 적 없는 사람과의 헤어짐도 작별이라고 부를 수 있는지 이야기하고 싶은 기분이었지만 마땅히 이야기할 사람이 없었다. 이런 재미없는 얘기를 누구랑 할까? 나는 혼자 걸었지만 특별히 혼자가 된 기분도 아니었다. 배가 고팠지만 입맛이 없었다. 이것 역시도 특별한 일은 아니었다. 오늘따라 배가 고파 속이 쓰린 기분을 느끼고 싶지 않았다. 역에서 가까운 식당을 찾았다. 밥을 먹었다. 관성 같았다. 그날 밤에도 어김없이 무늬없이 하얀 천장만 겹쳐서 보였다.

  같은 천장, 같은 방. 나는 눈을 떴다. 죽고 싶어서 선로에 누웠는데 기차는 영원히 오지 않는다. 나는 아침마다 텅 빈 선로를 마주했다. 이 텅 빈 공간에는 정말이지 아무 것도 없어서, 죽음조차도 유치하고 부질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게 뭔데? 나는 끝없이 묻고 또 묻다가 더 이상 물을 힘이 없어지면 몸을 일으켰다. 눈 앞이 잠시 까매지고 몸이 휘청였다. 이 어지러운 감각이 차라리 나았다. 또 밥을 먹는다. 배가 고픈 내 몸과, 아무 것도 먹고 싶지 않은 나는 분리되어있다. 구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구역질이 났다.

2020.03.30 p.m 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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