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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와 글쓰기/글쓰기

낙태죄 폐지보다 중요한 것

by manydifferent 2021. 1. 20.

낙태죄 폐지는 여성의 자기 결정권과 태아의 생명권에 대한 논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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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 나는 이 주제에 초점을 맞추어서 생각했다.

나는 '여성의 자기결정권' 이라는 원을 하나 그려넣었다.

그리고 그 안에 태아(배아)를 놓았다.

그리고 태아의 생명권이 인정받는 시기를 '과학적으로' 판단할 근거를 마련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예를들어 22주 내외의 태아는 독자적으로 생존할 수 있다고 판단할 수 있다. (헌재 헌법불합치 의견)

그렇다면 이 시점에서 하나의 생명으로 인정되어 '여성의 자기결정권' 에서 독립해 생명권을 보장받아야하는 주체가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여기의 쟁점은 '태아가 어느정도 성장해야 생명인가' 인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의문이 들었다. 그 의문은 다음과 같다.

1. 낙태를 결정하게 되는 이유가 무엇인가?

2. 두 가지의 권리를 동시에 인정해야만 하는 문제일 수도 있다.

1번은 여성의 자기결정권의 행사가 낙태의 결정으로 이어지는 맥락을 확인해야한다는 물음이다.

2번은 두 가지 권리가 어느 한쪽이 일방적으로 희생될 수 없는 권리인 것은 아닐까에 관한 물음이다.

나는 두 가지 권리를 나란히 다시 그렸다.

어쩌면 이 논의는 두 가지 상충하는 권리 간의 싸움이 아니라 외부 요인에 의해 두 가지 권리가 별개로 침해되는 사례로 보아야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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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먼저 실질적으로 인공임신중절수술이 필요한 맥락이 무엇인지 알아야한다고 생각했다.

우선 인공임신중절수술은 법률에 의해 제한적으로 허용되어있었다. (모자보건법 제14조)

그리고 모자보건법에 의해 허용된 한계, 즉 유전학적 장애, 전염성 질환, 강간, 산모의 위험에도 불구하고 임신 24주 이내에만 가능하다는 단서 또한 달려있다. (모자보건법 시행령 제15조)

그렇다면 인공임신중절수술이 필요한 맥락이란 이 법률이 허용하는 한계를 넘어서는 요인들을 뜻하게 된다.

그 한계는 두 가지로 분류해볼 수 있다.

일차적으로는 법률 자체가 가질 수 있는 모호함이다.

- 유전학적 장애, 전염성 질환, 강간. 산모의 위험 등에 대한 명확한 판단이 가능한가?

유전학적 장애의 심각성과 산모의 위험 등에 대한 의료적 판단, 강간에 대한 형법적 판단이 완전하다고 볼 수 있을까?

물론 이 논의는 수많은 법률이 가진 한계점이기도 하다. 하지만 임신의 유지와 출산의 막대한 책임과 비용을 감안했을 때, 이런 불완전성에도 불구하고 태아의 생명권을 들어 '자기결정권을 침해할만한 정당한 법률'로 볼 수 있는 가'에 대한 물음은 가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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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나는 2019년에 이루어진 헌법재판소 헌법불합치 의견의 일부를 인용하고자 한다.

헌법불합치 의견(유남석·서기석·이선애·이영진 재판관)

“모자보건법상의 정당화사유에는 다양하고 광범위한 사회적·경제적 사유에 의한 낙태갈등 상황이 전혀 포섭되지 않는다. 사회경제적 이유로 인해 낙태 갈등 상황을 겪고 있는 경우까지도 예외없이 임신한 여성에게 임신의 유지 및 출산을 강제하고, 이를 위반한 경우 형사처벌한다는 점에서 위헌이다”

헌재는 다양하고 광범위한 사회적, 경제적 사유가 있으며 법률이 이를 포섭하고 있지 못한다고 지적했다.

이것은 법률 판단의 한계를 넘어선 외부 요인들이다.

자기결정권, 즉 사적 상황에서의 자의적인 권리를 행사하는데에는 여러가지 맥락이 있을 수 있다.

개인적 기호 이외에도 한 사람의 삶을 아우르는 행동 양식인 가치관, 경제적 수준을 비롯하여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처할 수 있는 여러 환경 등이 맥락으로 존재한다.

하지만 모자보건법의 정당화 사유는 법률적으로도 불완전할 수밖에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다양하고 복잡한 갈등 상황을 외면하고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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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첫 번째 의문부터 알아보자.

여성의 자기결정권 행사가 낙태로 이어지는 맥락은 무엇인가?

이 질문에 대해 답을 하려면 앞서 언급한 인공임신중절수술이 필요한 맥락에 대해 생각해야한다.

헌재는 모자보건법이 포섭하지 못한 맥락이 있다고 했다.

만약 모자보건법이 포섭하지 못한 맥락이 인공임신중절수술을 강제하는 불가피한 맥락이고, 이러한 맥락의 원인이 외부에 있다면?

그렇다면 개입된 요인들을 확인해 그곳에 책임이 있지는 않은지 따져보아야 할 것이다. 이것은 무언가를 형법적으로 처벌할 때에 행위자를 '지유롭지 않게' 만드는 맥락이 존재한다면 감형의 사유가 되는 것과 같다.

헌재에서 언급한 광범위하고 다양한 경제적, 사회적 맥락에는 무엇이 있을까?

지금 우리 사회는 임신한 여성, 출산한 여성들이 너무 큰 사회적 비용과 과중한 책임을 짊어지고 있다.

임신 과정의 고단함을 이해하지 않는 사회 구성원, 경력단절로 대표되는 사회와의 단절 강요, 여성에게만 책임적으로 부여되는 육아 등은 이에 대한 직접적인 사례이다.

이런 사례 속에서 여성이 할 수 있는 자기결정권의 행사가 어쩔 수 없이 낙태로 이어지는 것은 아닐까? 자아 실현과 행복한 삶 추구라는 인간의 보편적인 목적을 가능한한 '일반적으로' 영위해야하기 때문이다.

단순한 예를 들어보자.

결혼한 두 부부가 육아 계획을 통해 자녀를 임신한 경우인데, 상대 배우자가 결혼 관계 유지를 위한 의무를 소홀히 한 것이 상당 부분 인정된다고 해보자.

이 경우 두 부부는 법적으로 이혼 절차를 밟을 수 있고, 또한 이혼 사유에 상대 배우자의 과실이 법적으로 인정되면 위자료와 양육비를 청구하여 금전적인 보상을 받을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계획한 아이를 낳아 기르는 문제는 단순한 금전적인 보상으로 간단히 해결될 수 없다. 아이의 양육에는 아이에 대한 정서정 지지 제공, 아이가 자랄 수 있는 환경을 유지하기 위한 가사 노동을 비롯한 실질적인 노동이 수반되기 때문이다.

이 경우 상대 배우자가 법이 강제하는 금전적 배상을 제외한 의무를 완전히 방조한다면, 임신한 태아에 대한 책임은 대부분이 임신한 여성에게 독점적으로 부여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금전적 배상을 '성실히' 한다는 것 마저도 지켜지지 않을 수 있다.)

아무리 법적으로 최대한의 의무를 부과한다고 하더라도 개인이 선택할 수 있는 상당수의 권리에 대해 그저 법원의 의사결정을 '합리적으로' 맡겨두어야 한다.

우리 사회가 여성 혼자 아이를 기를 수 있는 사회일까? 그것 역시도 결국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철저히 무시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또한 낙태죄의 주체마저도 임신한 부녀와 낙태를 촉탁 받은 의사로 한정된다. 이는 곧 무시된 경제적, 사회적 맥락들에 대한 책임을 임신한 여성이 짊어져야한다는 의미로 이어진다.

사회는 낙태죄로 사회의 치명적인 원인들을 무시한 채 태아의 생명권에 대한 논의를 여성 개인의 책임으로 몰아가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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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앞서 알아본 바 사회적, 경제적 맥락이 없다면 여성의 자기결정권의 행사는 곧 태아의 생명권 침해로 이어지지 않을 수 있음을 알았다.

그렇기 때문에 낙태가 이러한 맥락을 해결하는 '일반적인' 방법이 되어서는 안 된다.

이 시점에서 두 번째 의문에 대한 논의가 필요함을 알 수 있다.

독립적으로 존중받아야 할 두가지 권리를 침해하고 있는 요인을 찾아내는 것이 우선이다.

우리 사회가 건강한 사회라면 다음의 문제 두 가지에 대한 해답을 찾아야할 것이다.

1. 가정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여건을 갖춘 부부의 자녀 계획을 방해하는 요인이 무엇이며 해결책은 무엇인가?

2. 가정의 역할을 수행할 수 없는 상황에서 태어난 아이가 사회 구성원으로서 성장하기 위해 마련해야할 여건은 무엇이며 구체적인 마련 방법은 무엇인가?

나는 여성의 자기결정권 행사와 태아의 생명권을 연결 짓는 방법이 악의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 논의는 순전히 헌법재판소에서 법리적으로 심사할 것이지, 우리 사회에서 고민해보야할 내용과는 너무나 동떨어져있다.

그리고 위와 같은 물음은 우리 사회의 높은 자살률과 한없이 낮은 출산율과 밀접한 연관이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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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태죄를 폐지하는 것은 자기결정권을 침해하는 형법을 폐지하는 차원의 일이다. 낙태를 방조하거나 장려하는 일이 아니다. 이는 간통죄 폐지가 바람을 부추긴다거나 바람직한 사회의 가정 형태를 무너뜨리는 것이 아닌 것과 같다.

만약 낙태죄의 폐지가 무분별한 낙태의 증가로 이어진다면 그것은 형법의 부재 때문이 아니라, 병들어있는 우리 사회의 단면이 드러나는 것으로 보아야할 것이다.

또한 피임으로 충분히 막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무책임하게 이루어지는 낙태 또한 굉장히 빈번하게 벌어지고 있다.

이에 대한 원인으로 제시되는 제대로된 성교육의 부재, 올바르게 자리 잡지 못한 성관념, 가출 청소년 문제 등 또한 우리 사회가 병들어있다는 증거이다. 이것들이 과연 단순히 처벌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일까?

우리 사회는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서 어떤 해결책을 강구하고 있는가?

우리가 궁극적으로 생각해보아야할 것은 임신 몇주차의 태아를 죽여도 되는지, 혹은 죽이지 말아야하는지 하는 말장난 같은 논의가 아니다.

앞서 언급한 많은 문제들이 단순한 개인적 일탈이 아니라 사회 안전망에 커다란 구멍이 존재하는 것으로 보아야한다.

국가는 낙태죄 폐지 이후 어떻게 여성의 자기결정권과 태아의 생명권을 보장할 것인가?

낙태죄 폐지보다 더 중요한 논의는 바로 여기에 있다.

2021.1.9

< 모자보건법 제14조(인공임신중절수술의 허용한계) >

1. 본인이나 배우자가 유전학적 정신장애나 신체적 질환이 있는 경우

2. 본인이나 배우자가 전염성 질환이 있는 경우

3. 강간 또는 준강간에 의해 임신된 경우

4. 법률상 혼인 불가한 혈족 또는 인척 간의 임신된 경우

5. 임신의 지속이 모체의 건강을 심각하게 해치고 있거나 해칠 우려가 있는 경우

< 모자보건법 시행령 제15조(인공임신중절수술의 허용한계) >

1. 법 제14조에 따른 인공임신중절수술은 임신 24주일 이내인 사람만 할 수 있다.

< 형법 제269조 제1항 및 2항, 3항 >

1.부녀가 약물 기타 방법으로 낙태한 때에는 1년 이하의 징역 또는 2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2.부녀의 촉탁 또는 승낙을 받어 낙태하게 한 자도 제1항의 형과 같다.

3.제2항의 죄를 범하여 부녀를 상해에 이르게 한때에는 3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 사망에 이르게 한때에는 7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

(법률 용어로 사용된 '부녀' 는 여성을 지칭)

<헌법재판소 헌법불합치 의견>

“임신한 여성이 임신을 유지 또는 종결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은 스스로 선택한 인생관·사회관을 바탕으로 깊은 고민을 한 결과를 반영하는 전인적 결정”이라며 “태아가 독자적으로 생존할 수 있는 시점인 임신 22주 내외에 도달하기 전이면서 동시에 임신 유지와 출산 여부에 관한 자기결정권을 행사하기에 충분한 시간이 보장되는 시기까지의 낙태에 대해서는 국가가 생명보호의 수단 및 정도를 달리 정할 수 있다고 봄이 타당하다”

“모자보건법상의 정당화사유에는 다양하고 광범위한 사회적·경제적 사유에 의한 낙태갈등 상황이 전혀 포섭되지 않는다. 사회경제적 이유로 인해 낙태 갈등 상황을 겪고 있는 경우까지도 예외없이 임신한 여성에게 임신의 유지 및 출산을 강제하고, 이를 위반한 경우 형사처벌한다는 점에서 위헌이다”

“자기낙태죄 조항과 의사낙태죄 조항에 대해 각각 단순위헌 결정을 할 경우, 임신기간 전체에 걸쳐 행해진 모든 낙태를 처벌할 수 없게 됨으로써 용인하기 어려운 법적 공백이 생기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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