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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와 글쓰기/글쓰기

체스를 두면서

by manydifferent 2021. 1. 20.

퀸스갬빗을 보고 체스를 두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어릴 때 체스에 조금 관심이 있어서 행마법과 간단한 규칙만 조금 알고 있는 상태였다.

나는 전략 게임을 잘하지 못한다. 게임은 늘 좋아했지만, 실력을 갖추어본 적은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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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ess.com 이라는 사이트가 있다. 세계인들과 체스를 둘 수 있는 곳이다.

그리고 잘 정리된 체스에 대한 강의도 제공한다. Chess.com 에서 퀸스갬빗의 주인공인 '베스 하먼' 의 인공지능과 체스를 둘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들어갔다.

베스 하먼은 8살 때부터 체스를 두기 시작한다. 보육원의 지하실에서 건물 관리인 샤이벌 씨에게 체스를 배웠다. 드라마에 등장하는 나이대별로 인공지능의 난이도가 달라진다.

체스에는 Elo 레이팅이라는 개념이 있다. 공식 대회를 통해 체스 선수의 실력을 점수로 나타내는 체계이다. Elo 레이팅에 따른 평균 점수는 1,200점이다.

Elo 레이팅에는 체스의 룰을 숙지한 초보자 수준인 400점에서 600점부터, 그랜드 마스터의 수준인 2,700점까지 점수가 분포해있다.

Chess.com 은 베스 하먼 인공지능을 8살에서부터 22살까지로 나누어 만들어놓았다.

보육원 지하실에서 건물 관리인과 처음 체스를 두던 8살의 베스 하먼은 레이팅 800점, 체스를 배우기 시작한 후 9살의 베스 하먼은 레이팅 1,200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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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살 베스 하먼은 쉽게 이겼다. 그리고 자신감이 생겨 1,200점 9살 베스 하먼에게 도전했으나 이길 수가 없었다.

그래서 레이팅 1,000점점의 Emir 에게 먼저 도전했다. 두 번의 도전 끝에 승리했다.

그리고 레이팅 1,100점의 Sven 에게 도전했다. 네 번 정도 도전했는데, 이기기 쉽지 않았다.

도대체 체스를 어떻게 두는 걸까? 나는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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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스 말을 아무 생각 없이 움직이면 유리한 상황을 만들어나갈 수 없다.

상대방이 다음에 어떻게 둘지, 내가 이 수를 두어서 다음에 어떻게 진행할지에 대해서 고민해야한다.

체스를 가르쳐주는 강의는 많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내가 두는 판에서 현재 상황에 무엇을 두어야하는지 알려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몇가지 원칙을 익힌 후에는 모든 고민을 내가 해내야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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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체스를 둘 때는 실수를 한다. 수많은 실수를 할 것이다.

상대방이 공격할 수 있는 자리에 말을 두어 바로 잡아먹히는 경우도 흔하다.

고민을 한다고 열심히 했는데, 상대방 차례가 되면 그게 어이없는 실수로 밝혀진다.

이 단계에 오면 체스가 갑자기 너무 어렵게 느껴지고, 흥미를 잃게 된다.

'이걸 어떻게 하란 말이야? 너무 어려워.' 라는 말이 입에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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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쁘지 않은 실력이야. 샤이벌 씨 정도는 되는 것 같네.

(베스 하먼은 건방지다.)

여기서 포기하지 않고 계속 둔다면 어떨까?

어떻게 해야 '잘' 두는 지는 잘 모르겠지만, 일단 실수는 하지 말아보자.

내가 당장 확인할 수 있는 실수를 안한다고 생각해보는 거다.

나는 내 나름의 체스 원칙을 세우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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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내가 두는 자리가 상대가 바로 공격할 수 있는 자리인지 확인한다. (기초)

2. 내가 기물을 움직인 후에, 움직인 자리에서 또 다른 괜찮은 움직일 곳이 있는 경우에만 움직인다.

3. 기물을 교환할 때, 교환한 후에 상대 기물이 좋은 자리를 선점하게 되거나, 진출을 돕는 경우에는 두지 않는다.

4. 내가 두는 자리가 상대 기물을 위협하는 자리일지라도, 내 기물 두개가 동시에 위협 당하는 자리일 경우 두지 않는다. (자발적으로 핀 상태에 놓이면 대부분 불리해진다.)

5. 지금 내가 움직일 기물이 다른 내 기물을 보호하고 있지는 않은지 확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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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두면 안되지.

내가 몇 판을 두면서 했던 실수들을 까먹지 않고 메모한 후에 원칙을 세웠다.

체스를 잘 두는 사람들을 보면 뭔가 다들 대단한 방법을 알고 있는 것 같이 느껴지지만, 내가 그게 뭔지 알 수 있는 방법은 없다.

나는 나름대로 잘뒀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실수로 밝혀지면 왜 그게 실수인지 잠깐 생각한 후에 원칙을 세우는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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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칙을 염두하면서 하나 하나 꼼꼼히 두었더니 Sven을 이길 수 있었다.

놀라운 결과였다.

왜냐하면 내가 전략을 가지고 게임을 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의 수를 두면서 앞으로 일어날 일은 거의 몰랐고, 원대한 계획을 세우지도 못했다.

나는 단지 내가 여태 했던 실수를 모아서 원칙을 만들고 따르는 데에 충실했다.

나는 여태 전략 게임을 잘해본 적이 단 한번도 없기 때문에 이게 꽤 신기하고 재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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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약간 자신감이 생겨 9살 베스에게 다시 도전했다.

원칙을 충실히 지키며 열심히 한 수씩 두다보니, 처음 베스와 두었을 때보다 훨씬 좋은 결과가 나왔다.

기물을 유리하게 교환해서 체크메이트 직전까지 게임을 몰아갔다.

기물 차이로는 체크메이트를 하고도 남았으나, 나는 따로 전략이 없었기 때문에 체크메이트를 할 줄 몰랐다.

그래서 벌려놓은 기물 차이로 베스의 모든 기물을 잡아먹자! 하고 남은 기물 사냥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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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게 실수라는 것을 알았다.

체스에는 무승부에 관련한 규칙이 많다. 상대방이 둘 곳이 없어지면 (우세인지 열세인지와는 관계없이) 무승부가 된다. 이것을 스테일메이트라고 하는데, 불리한 경우에 일부러 스테일메이트를 만들어 패배를 피하는 전략도 있다.

나는 체크메이트를 할 줄 몰라서 베스와 다섯 판 넘게 무승부가 났다.

그레서 무승부가 난 이유를 고민해서 새로운 원칙을 만들어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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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스에 관해 이런 저런 고민을 하다보니, 이런 과정들이 어딘가 익숙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원래 잘 하지 못하는 분야를 열심히 하는 것을 좋아한다.

원체 재능이라고는 없는 사람이라, 뭘 새로 시작해도 처음부터 감을 잡고 해나가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래서 내 유일한 장점이라고는 완전히 새로 시작해본 경험이 많다는 점뿐인데, 이 경험들이 참 묘하고 재밌는 부분이 있다.

완전히 다른 분야인데도 처음 시작 할 때 익숙해지는 과정이 굉장히 닮아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정말 감을 잡기 어려워 보이는 수많은 일들은 대부분 다음과 같은 과정을 거쳐 익숙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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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한다-실수한다- 좌절한다-포기하지 못한다-

다시 한다-고민한다-나름의 이유를 찾아 적용해본다-나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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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과정을 거치다보면, 내가 직접 찾아낸 어떤 요소들이 생기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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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이게 중요하구나' '이건 하지 말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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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요소들이 생기고 나면, 이 요소들을 최대한 염두하면서 신중하게 해나간다.

그리고 또 다른 실수를 발견하면 이 과정을 잊지말고 새로운 요소와 원칙으로 만들어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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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과정을 거치면 처음에는 정말 감이 안 오고 어려운 일처럼 느껴졌던 것들이라도 갈피를 잡을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이렇게 발견한 요소들을 다른 새로운 것을 시도할 때 공유할 수 있을 때도 있다. 그럴 때는 정말 기쁘다.

앞으로 체스를 더 열심히 두게 될지는 모르는 일이지만, 일단 이렇게 기록해둔다.

2020.1.14

+후기

집요하게 중반부터 체크메이트를 노린 결과, 3번의 실수 끝에 승리를 얻어냈다.

난 지는 게 싫어! 다시 하자.

기쁘다.

2020.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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