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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와 글쓰기/일기

2019년 3월 18일 열등한 나

by manydifferent 2019. 3. 18.

2019년 3월 18일 월요일


날씨: 일교차가 조금씩 줄어든다. 어떤 계절의 꼴을 갖추는 느낌이 든다.


서론


 나는 열등해. 


 그 앞을 꼭 채우는 말이 있다. 나는 이만큼 했지만, 이정도는 누구나 다 해. 그래서 나는 열등해. 대단한게 아니니까. 내 삶은 그다지 대단하지가 않으니까. 이 생각은 학창시절부터 나를 많이 괴롭혔다 그맘때 연애도 해보면서, 나는 내가 사랑을 받을 수도 있다는 걸 알았지만, 이 열등한 마음은 좀처럼 내가 구원 받는 꼬라지를 두고 보지 않았다. 상대에게 어떤 구원을 갈구한다면, 그 관계는 곧 병들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내가 병들어 죽는 내용을 담고 있지는 않다.


1장 실용음악 입시


나는 노래하는게 좋았다. 죽을만큼 노력해도 노래로 돈 벌어먹고 살 정도는 아니라고 확신한다. 그건 그다지 원하는 일도 아니다. 후회하는 건 아닌데, 발상이 조금 웃겼던 것 같다. 노래가 좋은데 입시를 준비하다니. 나는 스무 살 때 수능 재수를 그만 두고 실용음악 학원을 다녔다. 그전의 나는 화장실이나 방에 틀어박혀서 노래를 불렀다. 당시 가끔 만나는 위층 아저씨가 노래도 못부르면서 뭘 그렇게 시끄럽게 하냐고 핀잔을 줬지만 (물론 너무 미안한 일이다.) 난 그 시간이 좋았다. 그 때는 막연히 잘 한다는 생각이 있어서 그런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입시 학원을 다니면서 당연히 나는 대학에 붙기 위해 연습했다. 그리고 당연히 내 노래는 평가 되고 비교 됐다. 당시 나의 열등감은 하늘을 찔렀다. 물론 그 시간이 모두 나빴던 것은 아니다. 배우는 건 나름 즐거움이 있었고, 나는 노래가 꽤 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시간들을 보내고 나서도 내가 노래를 부르는 일을 영영 싫어하게 되지는 않았다는 점이 가장 값졌다.


 나는 왜 열등감을 느꼈을까. 그렇다. 내 노래는 쓰레기였다. 난 노래를 못 부르니까. 당연히 내 노래는 쓰레기였던 거다. 노래를 부르고 싶어하는데 목에서 쓰레기만 나온다면? 그런데 주위 누군가는 꽤 근사한 노래를 하고 있다면, 당연히 나는 열등감 속에 빠져들게된다. 나는 원래부터 대학교에 갈 생각이 없었다. (물론 이건 변명처럼 들리는 구석이 있지만 사실이었다.) 그 때 나는 음악하는 사람들이 부러웠고, 그 삶을 알고 싶었으니까. 나는 어느정도 그 목표를 이룬 셈이었다. 그래서 시험에 떨어진 후, 조금 급하게 학원을 나왔다. 더 이상 열등감 속에 있고 싶지 않다는 마음도 있던 것 같다.


 일 년정도 마음껏 방황했다. 온전히 자유가 주어진 상태는 방황이 아니다. 난 당시에 부자유스러웠다. 그래서 최선을 다해서 방황했다. 일도 나름 열심히 하고, 주변에 개기기도 엄청 개겼다. 와중에 고작 칠 수 있는 피아노가 내 자존심을 조금 지탱해줬던 것 같다. 근데 진짜로 잘 치진 않았다. 중요한 건, 늘 나는 '내가 잘 하는사람 처럼 보인다는 것'에 기쁨을 느끼고, 그걸 유지하려고 목을 매달았다는 거다.


그래 그게 나는 늘 중요했다. 무언가를 잘하는 사람 처럼 보이는 것. 내가 뭔가 뛰어난 사람처럼 보이는 것에 행복을 느꼈으니, 열등감에 빠지지 않을래야 않을 수가 없었던 거다. 왜냐면 당연히 난 잘난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그리고 잘난 사람이 되는 것은 불가능한 목표니까.



2장 문예창작과 입시


 지금도 그렇듯, 그 때의 나는 그다지 현명하지 않았다. 21살 막바지에 훈련소를 다녀오고, 군복무를 시작했다. 난 여전히 내가 뛰어난 사람이라는 것을 입증하는 것에 목매면서 살았다. (물론 쥐뿔도 뛰어난 거 없었다.) 그래서 또 늘 관심 있던 글쓰기를 시작했다. (내가 글을 퍽 잘쓰는 것 처럼 '보이는' 사람이 아니었더라도 내가 글을 쓰는 시늉을 했었을까? 웃기는 일이다. 그나마 잘하는 것 같아보여서 했을 거다 나는.) 


 그리고 글을 쓰는게 좋으면 그냥 글을 쓰면 되는데, 바로 문예창작과 입시 준비를 시작했다. 참 웃기는 새끼다. 심지어 대학도 가장 좋아보이고 마음에 드는 곳만 시험 봤다. 난 당연히 특별하지 않았고, 글 쓰는 것도 재미가 없었으므로, 시험에는 떨어졌다. (나는 이 일기를 쓰면서 알았다. 난 글 쓰는게 재미없었다. 글을 쓰는 사람인게 좋았던 거다. 뭔가 잘하는 척 하면 좋으니까.) 와중에 나름 열심히 하긴 졸라 열심히 했다. 


 그래서 문창과 입시의 결과는 뭐였을까? 내 글이 쓰레기라는 걸 깨달은 거다. 나는 2년을 정말 최선을 다해서, 내가 쓰레기라는 걸 깨닫는데에 썼다. 이보다 값진 경험이 있을 수 있을까?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지금 회고하면서 명료해졌다.


3장 그래서 내가 쓰레기였냐고?


 물론 아니다. 나는 내가 쓰레기였다는 결론을 내기 위해서 지금 타자치고 있는 거 아니다. 내가 여태까지 쓰레기 같은 삶을 살았던 이유는, 어디까지나 내가 목표로 한 것이 '남들보다 잘난 것처럼 보이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지만, 나는 그럴 능력이 안 된다. 내가 자격 미달이라서라기 보다는 목표가 너무 높은 거다.


 난 목소리가 꽤 좋다. 가끔 혼잣말 할 때도, 혼자 노래 부를 때도 스스로 그렇게 생각할 때가 있다. 하지만 내 목소리가 배우 이선균만큼 눈에 띄게 좋은 구석이 있지 않다고 생각한다면, 내 목소리는 금방 쓰레기가 된다. 이건 내 많은 부분에 어떤 기준을 들이대도 쉽게 만들 수 있는 관계다. 여기서 의문이 생긴다. 근데 정말 그럴 필요가 있을까?


 혹자는 이것을 정신승리라고 생각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자명하게도 당연히 아니다. 내 삶은 유한하다. 그리고 내 삶을 보편적인 무언가로 치환할 수 없다. 이 두 가지를 생각한다면 이것은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생각이 된다. 그러니까 나는 여태까지 내 삶을 보편적인 무언가로 교환할 수 있다고 믿은 것이다. (교환할 수 있다는 것은, 일정한 기준에 의해 가치를 측정할 수 있다는 말이다. 즉 내 삶이 화폐화가 가능하다고 볼 수 있다.)


 다시 생각해보면, 나는 내 노래를 어떤 기준에 의해 비교 가능한 무언가라고 생각했던 거다. 나는 그 비교 가능한 척도에서 상위권을 석권하길 바란 거고, 그게 뜻대로 되지 않으니 커다란 열등감에 살았던 거다. 근데 그런 일이 가능할까? 물론 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여태까지 내가 고통 속에 있었던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런 시도를 하고 있고, 또 그것을 많이 받아들이고 있다. 너무나 자연스럽게. 각자의 삶을 화폐화 하는 것에 이제 더 이상 거부감조차 없는 것이다. 하지만 결국 화폐화가 가능한 것은 어디까지나 사람들이 받아들이기 때문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4장 그래서?


 그래서, 내 가치가 보편적인 무언가로 치환될 수 없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우리는 자본이 우리를 자유케하는 세상 속에서 살고 있는데 과연 이게 가당키나 할까. 안타깝게도 나는 여전히 이것에 대한 정확한 답을 찾지 못했다. 하지만 이제부터 여러가지를 시도해볼 생각이다.


 섣불리 내 삶을 화폐로 바꾸려는 시도는 하지 않을 거다. 그러니까, 이제부터는 좋아하는 일이 생겼을 때 그냥 좋아하면서 할 거라는 말이다. 물론 나는 살아있기 위해 돈이 필요하다. 이것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단지 온전히 좋아하는 일들을 하는 그 시간들을 있는 그대로 조바심 없이 보낼 생각이다. 이는 내 삶이 유한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내 삶은 빠르게 끝날 것이며, 나는 가급적 고통스럽지 않은 시간을 보내고 싶기 때문이다.


  더 이상 잘난 것처럼 보이는 것에 목을 매달지 않을 거다. 왜냐면 난 정말 잘나지 않았거든. 혹시 많이 잘났었으면, 좀 비벼봤을 수도 있다. 이제 나는 그저  내 고통스러운 시간들을 그나마 따뜻하게 보낼 수 있도록 해주는 것들을 좋아하며 살 거다. 나는 내 노래에 즐겁고, 내 글에 위로 받는다. 이런 시간들만큼 시간을 훌쩍 보내는 일이 없다. 그랬을 때, 내 글도 노래도, 내 삶을 차지하는 모든 부분은 더 이상 쓰레기가 아니다. 나는 곧 죽을 인간이며, 내 삶의 조각들은 (정말 의외로)보편적인 무언가로 거래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나는 누군가 내게 잘생겨보인다고 했을 때, 나보다 잘난 (삶을 사는 것 같은) 사람들의 얼굴을 불분명하게 떠올리며 '아냐 나 그렇게 잘생기진 않았어.' 라고 말한 적이 있다. 이건 참 웃기는 얘기다. 지금 당장 내가 잘생겨 보인다는데 토를 달 것이 뭐가 있었나. 조금 다르게 생각해보면, '그렇게 잘생긴 상태' , 즉 은연 중에 객관적으로도 졸라 잘생긴 상태를 갈구하고 있었다는 걸 알 수 있다. 그 객관적이라는게 가능한 기준이 아님에도 그랬다. 그냥 그 순간에 좋아보이는 것을 좋다고 하면 된다. 객관적으로 졸라 좋을 필요도 없으며, 그 기준은 애초에 존재하지도, 가능한 것도 아니다.


 5장 후기


사실 생각을 정리하고 쓰기 시작한 것이 아니다. 하지만 막상 쓰면서 생각이 많이 정리 됐다. 예전보다는 덜하지만, 요즘도 이따금 그런 오묘한 열등감에 휩싸일 때가 있다. 내 삶은 그냥 내 삶이다. 내 삶을 벗어나있는 무언가에 목 맬 필요는 없다. 이 시간은 그저 흐르고, 어떤 나의 시간을 함께한 누군가를 사랑하고, 어떤 나의 시간을 흘려보내준 무언가를 사랑하면 된다. 행복이 뭘까 하는 멍청한 의문이 든다면, 밖에 나가 몸을 움직이자. 그래도 안 되면 혼자 여행을 떠나자. 외로움을 달래주는 고마운 것들을 위악적으로 버려 놓고선, 삶에 몸을 던지자. 나는 특별히 살아있을 이유도, 죽을 이유도 없다.


 2019.03.18 PM. 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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