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일기와 글쓰기/일기

2018년 5월 3일 금연하는 치질 환자인 나

by manydifferent 2019. 1. 27.

2018.05.03

AM:07:22

날씨: 안 나가봐서 아직 모른다. 하지만 어제 비가 내렸고, 오늘은 여름이 오기 전 마지막으로 선선한 날이 될 것 같다.

 

세 가지. 쓰고 싶었는데 쓰지 못한 말들이 있어서 아침 시간을 빌려 적는다.

 

1. 담배에 관한 것.

2. 치질에 관한 것.

3. 태도에 관한 것.

 

담배를 피우면서 생기는 건강적인 문제들. (늦어지는 기상시간과 떨어지는 수면의 질은 우습게 볼 일이 아니며 이것은 삶에 큰 영향을 끼친다. 이것은 같은 저울에 달아 따져보아야 할 문제다.) 처음에는 이런 문제들에서 벗어나기 위한 방법으로서 금연을 했다. 성공한 적이 없다. 왜냐면, 금연은 애초에 성공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 담배를 피우지 않은지 보름 가까이 되었다. 정확한 날짜는 잘 모른다. 많은 사람들이 금연을 시도하고, 나 역시도 다양하게 금연을 시도한 사람이다. 처음 담배를 피우게 된 것이 ‘타인의 시선에 맞서는 온전한 나의 선택’ 이었다. 23살 봄이 될 무렵. 누구도 내 흡연을 간섭하지 않게 되었고 나는 담배를 더 이상 피울 이유를 찾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내 몸은 계속 담배를 원했다. 나는 이것을 의존이라고 결론 내렸다.

그렇다면 여태 금연은 왜 실패했을까?

금지된 것에 대해 성공이란 말을 할 수는 없다. 예컨대 금주는 불가능하다. 무엇이든 마실 수 없게 되는 상태가 아니라면 우린 언제든 술을 마실 수 있기 때문이다. 금지된 것은, 그냥 금지 된 것이다. 그것이 우리가 열렬히 원하는 것일 지라도. 금지하는 것은 열렬한 마음에 불을 지필지언정 욕망을 잠재워주진 않는다.

지금은?

지금은 매일 담배가 피우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이것은 내 몸이 원하는 것이다.) 피우지 않는다. 딱히 피우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그게 전부다. 몸이 원하는 상태가 호락호락하다는 것은 아니다. 난 몸이 자주 가렵지만, 긁지 않을 때도 있다. 딱히 긁어서 상처를 내고 싶지 않기 때문에. 그렇다고 가려움이 가볍게 넘길 수준이라는 말은 아니다. 내가 이렇게 하는 이유는 내 행동이 삶에 끼칠 영향을 고려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고려가 아닌 두려움일 때 무언가를 금지하게 된다.

 

치질에 관한 것.

 

어제 내시경으로 치열 부위를 살폈다. 아주 희미한 흔적만 남아있었다. 여태 내 배변습관이 문제라고 생각했는데 아닌 것 같다. 배변습관도 물론 별로였지만 식습관이 최고였다. 끼니를 자주 걸렀고, 이상한 걸 자주 먹었다. 맵고 짜고 한 것들 말이다. 그냥 기억하고 싶었다.

 

태도에 관한 것.

이것에 대해서는 더 쓰고 싶었는데, 시간이 별로 없다. 난 출근을 앞두고 있기 때문에.

요약하면 간단하다. 우리는 살면서 위협을 당한다. 날 불쾌하게 만드는 일들이 생긴다. 그럴 때 우리는 적극적으로 의사를 전달해야한다. 나는 그것이 보다 인류애적이라 느낀다.

 

아파트 입구와 연결된 야외 주차장에 아이들이 자유롭게 놀도록 풀어놓는 부모들. 아이들은 주차장에 눕기도 하며 자전거나 퀵보드를 타고 다닌다. 나는 차로 출퇴근을 하며 주차를 할 때마다 아이가 튀어나올지 모르는 불안에 떤다. 사고를 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건 아주 중요하다.) 아이의 부모들은 조금 떨어진 곳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다. 나는 화가 나있다.

 

여기서 내가 두 가지 선택을 할 수 있다고 해보자.

 

사고가 날 우려를 갖고 있으면서도, 조심조심 주차를 하는 것과

 

클락션을 누르고 부모를 불러내 부족한 안전 관념에 대해 육두문자 섞어 지적하는 것.

 

짧게 말하면, 내 입장은 후자를 선택하는 것이 현명하다는 것이다. 일단 나는 이미 화가 나 있으므로 욕을 하는 것은 불가피하다고 가정한다. 그리고 그것은 꽤 효율적이다. 내 감정적인 면과 목적을 달성하는 면 모두에서.

만약 내가 조심조심 주차를 하다가 아이를 친다면?

나는 정말 화가 나지만 책임은 나에게 있다. 그들의 부모는 보험처리를 원할 것이다. 나는 울화통이 터져서 그들을 죽이고 싶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들 부모는 아이가 다치거나 죽어서 슬프고, 나는 불필요한 상황에 휘말려 슬프고, 결과적으로 아이도 죽고 부모도 죽고 나는 감옥에 가게 된다.

 

반면 후자의 경우는?

나는 속이 풀려서 좋고, 아이들은 조심해서 좋고, 부모는 아이가 다치지 않아서 좋다.

 

극단적인 것 같나?

나의 감정 또한 해결해야할 문제의 범주에 넣어두어야 한다. 감정을 억누르면 언젠간 문제가 생긴다. 그리고 참을 수 없는 것을 참으려고 하지 마라. 당신은 너무 화가 나서, 인류를 죽이려 들 수도 있다.

 

AM: 7:51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