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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와 글쓰기/일기

2017년 11월 4일 오후 8시 51분 입시와 나

by manydifferent 2019. 1. 27.

2017.11.04. 오후 8:51

날씨 한 달 전까지만 해도 낮에는 덥다는 인상이 강했는데 외투를 챙겨 입어도 새벽이나 밤 즘에는 팔다리에 쌀쌀한 바람이 스민다. 춥다는 생각을 한다.

 

일기를 써봐야지 싶은 생각을 참 많이 했는데, 막상 쓰질 않았다. 방이 너무 따뜻하다. 요즘은 그런 느낌이 든다. 어떤 허튼 소리가 되었던, 어떤 불순한 목적이었던 간에 글을 쓴다는 것에 매달리던 때가 있었다. 아마 2016년 여름에 순전히 살아만 있다는 사실에 회의를 느낀 이후가 아니었을까 싶다. 아니다, 그 이전에도 참 많이도 그랬구나. 지적 허영과 대단한 것으로 가장한 자존감이 감싸고 있던 내 내면은 문구용 수수깡처럼 가냘프고, 쉽게 부러지고, 값싼 것으로 이루어져있었고 그 사실이 견딜 수가 없을 만큼 두려웠으니까. 그 때마다 시를 썼다. 그럴 때면 난 그게 부끄럽지 않았다. 술에 잔뜩 취한 채로도 밤늦도록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현관 앞을 서성이면서 핸드폰을 꺼내 나는 쓰레기라고 적고 있었으니까. 내가 가진 장애가 장애라고 말할 때 부끄럽지 않듯이, 나는 내가 누군지 알았으니까.

나는 쓰레기다. 로 시작한 문장들은 나는 어떻게 쓰레기인지로 뻗어나가 나는 왜 쓰레기인가에 도착했고 나는 왜 쓰레기여야만 하는가에 대해선 언제나 침묵이 벽처럼 가로막았다. 나는 답을 찾지 못했다. 역마살이 단단히 들어있는지 나는 내가 무얼 해야 하는 사람인 것처럼 여기고 언제나 몰두했다. 삼 년 내내 입시에서 보기 좋은 구실들로 입시에서 도망친 것이 싫어 재수를 선언했고, 그 와중에 좋아하는 일을 하고 싶다는 미명을 그 위에 덮어버렸다. 도망친 게 아니라고, 스무 살 이전의 내 모습들은, 내가 진정으로 선택이란 걸 시작하기 전의 나의 모든 꿈들은, 욕망들은 만들어진 것이라고 생각했다. 난 노래를 했다. 더럽게 못하는 줄 알면서도. 나는 지금 알 수 있다. 후회라는 게 전혀 없다. 내 인생의 일 년을 허비했다는 허탈감도, 적막도 없이 디스크 정리가 잘 된 저장장치처럼 좋고, 나쁜 것이 황홀하게 뒤섞인 기억들만 남아있다. 그래서 지금. 또 다른 것에 몰두한다. 변명을 덧붙이자면 노래를 한 것은 (실용음악 입시를 시작한 것은) 애초에 대학을 목표로 하지 않았기 때문에, 결과가 만족스러웠고 그 과정에 그토록 매달렸던 것은 탈피를 위해 감싸놓은 고치를 매어둘 튼튼한 가지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내가 이번에 몰두한 것은 정말 입시다. 대학에 가고 싶다는 생각으로 입시를 준비한 것이다. 이번에 좋은 경험처럼 도망치면 난 영영 길을 잃게 된다. 아니 그렇게 박하지는 않더라도 나는 돌아갈 것이고, 한참을 방황하면서도 내가 이루지 못한 꿈 하나가 자성이 아주 강한 자석처럼 삶 어딘가에 깊숙이 박혀 내 행로를 방해할 것이다. 끌어당길 것이다. 나는 수도 없이 돌아볼 것이다. 유령처럼 떠돌 것이다.

그래서 지금은? 지금은 방이 따뜻하다. 따뜻해도 너무 따뜻하고, 이대로 얼마간의 온기를 붙잡아놓아도 좋을 것만 같고, 내가 그럴 능력이 있는 사람처럼 느껴진다. 이건 너무 명백한 허영일까, 오만일까, 이제 두려운 건 여기서 벗어나고 싶지가 않다는 거다. 그래 문단의 순서가 바뀌어야 맞겠다. 실은 방이 따뜻하다는 말은, 가장 먼저 생각났고, 내가 유령처럼 떠돌 것 같다는 말은 가장 나중에 생각난 말이니까. 이쯤 해도 좋겠다. 일기를 매일 써야겠다. 별안간 이야기로 만들어지는 세상이다. 말이 없이는 사유도 일어나지 않는다.


사족

일기를 쓰자. 말하고, 내가 말한 것을 듣고 있는 순간 외에는 난 죽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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