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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와 글쓰기/일기

2020년 9월 15일 털을 기르는 사람

by manydifferent 2020. 9. 15.

나는 머리도 기르고 수염도 기르고 있습니다. 털은 그냥 자라는 것인데 기른다고 말을 하니 재미있는 일 아닙니까?

살다보면 그런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사람들이 태어난 날 같은 것을 기념하고 있다는 사실이 놀랍다고요. 마치 태아때부터 그 날을 기념하기로 마음먹었다는 듯이 말입니다. 나는 비슷하게 그런 생각을 합니다. 이 세상 대부분의 남자라고 하는 사람들은 머리가 짧기로 하고, 여자라고 하는 사람들은 머리가 길기로 한 것도 참 놀랍다고요.

이렇게 생각하면 전통이나 관습같은 인간의 유산들은 새로운 세대를 내리누르는 악몽과도 같다는 말이 이해가 됩니다. 내 털들은 내버려두면 자라는데, 털의 길이를 정하는 것이 예의나 도덕같이 숭고한 것과 동등할 수가 있을까요.

이런 생각이 부쩍 강하게 드는 순간이 있습니다. 내가 즐겨 듣던 노래를 부른 가수가 이미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죽었다는 사실을 접할 때이지요. 나는 이 순간에도 내가 마땅히 해야할 일들에 대해 고민하지만 말입니다. 그건 문명인스러운 의무감이나 현명함이 아니라 어리숙함이나 두려움이 아닌가요? 진정한 의무나 숭고는 이 세상에서 안 해도 될 것들 취급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 않나요?

팔에 그림을 그려봅시다. 지워지지 않는 그림이요. 행여 이 그림이 평생 지워지지 않을까 두려워하고, 나중에 이 그림이 내 눈에 질릴까, 누군가 이 그림으로 나에게 불이익을 주진 않을까 벌벌떨고 있습니다. 그렇지만요, 살아있다는 것은 지워지지 않는 이야기를 쓰는 일입니다. 내 몸은 썩어 없어질 것인데 너무 오랜 시간을 두려워하고 있는 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니까 나는 해도 너무하고 있습니다. 너무 많은 것들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두려움에 떠는 것을 현명한 일이라고 착각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렇게 좋은 일이 아닙니다.

스스로 도는 힘을 중요하게 여겼던 사람도 내가 태어나기도 까마득히 전에 차에 치여 죽지 않았습니까? 두려움을 빼고 나면 삶에는 무엇이 남아있을까요.

2020. 09.15 오전 1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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